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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에 보는 흑백영화 '자산어보'
자산어보는 조선 1814년, 정약전이 저술한 해양생물학・수산학 서적이다.
영화는 '정약전'과 '창대'라는 두 인물의 우정을 그리고 그 결과로 탄생한
'자산어보'라는 책을 알려주고 있다.
정약전이라는 인물은 우리에게 그리 익숙하진 않으나
다산 정약용의 형이라고 한다.
그 다재다능한 학자 정약용이 집필할 때 형인 정약전에게 자주 의견을 물었다 하니
정약전의 학자로서의 깊이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영화의 시작은 시대배경을 그리는데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이 삼형제가 서학과 천주교를 받아들였다는 죄로
약종은 처형을 당하고 약전, 약용은 다행히 처형을 면해
각각 흑산도와 강진으로 유배를 가는 부분부터 시작한다. (1801년 신유박해)
약용은 류성룡, 약전은 설경구 배우가 맡아 더할 나위 없는 연기를 펼쳤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배우들이기도 해서 그들의 대사 하나하나에 집중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흑백이라 화면 보기가 좀 답답했는데
이 흑백화면이 신기한 것이
컬러가 없으니 자연스레 음영과 묘사에 집중하게 하는 매력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흰색 하늘,
검은색 바다,
그 위에 떠 있는 작은 나룻배
약전과 창대는 그렇게 물고기를 잡으며 지식을 쌓고 우정을 키웠다.
사실 창대는 처음부터 약전에게 친절했던 것은 아니었는데
글공부를 좋아하는 창대가 글에 능통한 약전에게 도움을 구하자
약전은 '나의 지식과 너의 지식을 바꾸자'는 거래를 제안하며
창대는 약전을 배에 태우기 시작했던 것이다.
나는 둘의 이야기를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간만에 영화에서 브로맨스를 느껴본다.
또한, 과거의 유산 '자산어보'가 어떤 식으로 집필되었는지
그 과정을 지켜보는 내내 즐거웠다.
영화 속 대사
하여 이제는 애매하고 끝모를 사람 공부 대신
자명하고 명징한 사물공부에 눈을 돌리기로 했네
이 나라의 성리학은 누구를 위한 것이냐?
이 나라의 주인이 성리학이냐 백성이냐?
내가 바라는 것은 양반도 상놈도 없고
적자도 서자도 없고 주인도 노비도 없고
임금도 필요없는 그런 세상이다
실학자 정약전의 사상을 단적으로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물론, 기존의 주류학문 말고도 개인적인 호기심으로 인해
수학, 기하학, 천문학 등 당시 조선인에게는 낯선 자연과학의 영역에
관심을 갖게 되었을 법도 하지만
그보다는 영화를 보면 약전이 왜 실학에 눈을 뜨게 되었는지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19세기 무렵,
서양국가들은 산업사회로의 발달에 가속도를 내고 있는데 비해
조선은 아직도 농경사회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으니
이처럼 뒤쳐진 상황이 정약전에게는 답답했을 것이다.
더구나 1801년은 신유박해가 일어난 해였다.
이 과정에서 정약전은 형을 잃었고 동생과 함께 유배길에 오르게 된 것 아닌가
나라의 후진성을 학자의 힘으로 극복해 보려
서양학문과 종교를 받아들였는데 가족까지 잃게 되었으니
정약전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자산어보'가 아니라 더한 것도
나왔어야 한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의 백미라고 생각하는 대사이다.
약전이 죽고 난 뒤, 그가 남긴 서신을 창대가 읽는 장면이다.
학처럼 사는 것도 좋으나 구정물, 흙탕물 다 묻어도 마다않는
자산같은 검은색 무명천으로 사는 것도 뜻이 있지 않겠느냐
아 이건 정말 ㅎㅎㅎ
입에서 감탄의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제서야 왜 이 영화를 흑백으로 만들었는지 알았다.
이 영화는 '왕의 남자'로 유명한 이준익 감독 작품이다.
그는 시대극을 주로 만들고
그 중에서도 불평등한 체제에서 고통받는 약자의 이야기를 하는 걸 좋아한다.
'검은색 무명천' 은
창대에게는 피지배계층을 의미하고
약전의 입장에서는 실학자를 의미한다.
'실사구시 實事求是'
인간을 이롭게 하는 학문에 그 귀천을 따지기보다
사실을 기반으로 진리를 탐구하려는 자세를 약전은 바랬다.
그리고,
흑백은 영화 전반에 걸쳐
보는 이로 하여금 편견을 갖지 않도록 하였다
색이 드러나지 않으면 인물들의 의복색 또한 드러나지 않는다.
입은 옷의 외형에 따른 추측은 가능할지언정
의복의 화려함이 흑백에 가려져 편견을 없애고
대신 상위계층이 하위계층에게 행하는 부조리함을 더 깊이 느낄 수 있게 해준다.
나는 이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라고 본다.
솔직히 감탄했다.
영화를 제작하는 데에 수많은 기법이 있겠지만
자산어보는 흑백영화로 내놓을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두 시간 남짓한 짧은 시간에 많은 걸 얻어간다.
앞으로 이런 영화가 더 많이 나왔으면 한다.
이 포스팅은 전형적인...잘 쓴 영화감상문이 아닙니다.
마음 가는대로 내 느낀 그대로를 썼기 때문에
내용에 두서가 없고 여러분이 익히 알고 있는 관람기의 형식과는 다를 겁니다.
그래도 꾸미지 않고 정직하게 적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